나의 검정노트를 "검정노트"라 부르기 시작한 건
내가 보통 '일기'라고 하는 글을 적는 이 노트가 실제로 검정색이기 때문이었다.
물론 이런 애칭이 붙여진 이후로 "검정노트"란 말은
색깔 이상의,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하게 되었다.
이 노트에 적는 글은 날짜만 꼬박꼬박 붙었다 뿐이지,
일기라고는 할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을 난 진작에 알고 있었다.
하지만 그 장르가 무엇인지, 아니 장르라고까지 할 것도 없고 어떤 성격의 글인지
굳이 설명하려거나 규정해 보려 애써본 적이 없었다.
아니, 그럴 필요가 없었다.
"검정노트"는 그저 내가 좋아서 붙인 이름이었고 나 혼자서만 쓰는 이름이었다.
아직까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이 노트에 대해
이것이 가진 무수한 의미는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.
그 모든 것을 '언어화' 하여 낱낱이 늘여놓아야 할 이유도 상황도 기회도 동기부여도 없었다.
나의 검정노트는 그 자체로서 "검정노트"이면 되는 것이었다. 적어도 지금까지는.
(참고: 2011/03/19 - [의식주/혼잣말] - 용기가 가득하면 좋겠어)
그런데 오늘 근영선생님의 융(C.G. Jung) 강의를 듣던 중에
전에 못 본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. (왜 그 동안은 몰랐을까?!)
누군가의 병을 고치기 이전에 '자기 자신의 의사'가 되려던 융이
'치유로서의 글쓰기'를 해나가던 방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,
그 첫번째가, 기억이나 꿈, 어떤 사건과 그 때의 감정에 대해
논리적 구성이나 인과적 서사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.
융은 그 과정을 '받아쓰기'라 표현하였고
자신이 '받아쓰기' 한 총 6권의 노트 ㅡ 어느 시점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ㅡ를
"검정책"이라 불렀다는 사실. !!!
이 "검정책"이라는 세 글자는 나의 얄팍한 공감대를 완벽히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.
(게다가 지난 두 해 동안 내가 융을 향해 쌓아온 애정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!)
그러고서, 그렇게 '받아쓰기'하여 언어라는 틀에 고정된 글을
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풀어내고 지적, 도덕적 여과 과정을 거쳐
하나 하나의 서사 ㅡ 신화로 엮어내는 두번째 과정을
융은 '번역하기'라 일컬었고
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'붉은책 The Red Book'이라는 것.
(참고할 만한 기사: http://www.seoul.co.kr/news/newsView.php?id=20110425021002)
그렇다. 내가 사랑하는 동서고금의 저자들이 흔히 그렇듯
융은 나를 대신하여, 내가 "검정노트"에 쓰는 글, 나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그 글(의 일부분)에 '받아쓰기'라는 자신만의 멋드러진 해석을 붙여준 것이다.
하긴,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어쩌면, "검정노트"에 씌여진 글 중 적어도 팔할 이상은
융이 그토록 비판하던 '자기 합리화'의 글일런지도 모른다.
묘사 이전에 이미 서사적 인과관계를 짜맞추는,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글.
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중에는 '받아쓰기'한 글이 꽤 있다는 것이고,
나는 그간 그 모든 '받아쓰기' 글을 '손을 보긴 봐야'할 것만 같은데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,
어려운 숙제를 남겨두고 잠드는 학생의 기분으로 차일피일 찜찜하게 미루고만 있던 것이다.
그런데, 이제 아예 융이 그 고민에 대한 해답까지 알려주고 있다. '번역하기'.
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번역을 해나갈지는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다.
하지만,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무얼 해야할지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
나는 올 가을 융에게 또 하나의 빚을 지게 된 셈이 되었다.
"붉은노트" 까지 쓰려는 욕심은 없다.
그건 아직 저ㅡ높이 아주 높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 일 뿐.
지금은 단지, 번역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일말의 감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으로
어디 한 번 찬찬히 시작을 해보려 한다.
아참 그리고, 좀 더 기술적(?)인 부분으로 눈을 돌리자면,
최근에 몇몇 분들께 나의 만연체와 괄호쓰기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.
특히 호흡이 너무 긴 만연체에 대해선 처음 듣는 지적이 아닌데다
(심지어 고등학생 시절 영어글쓰기를 연마하던 때에도 들었다 -.-)
평소에 블로그 등에 글을 쓰면서도 나 스스로 영 불편하고 찜찜하게 느껴지던 부분이었는데,
막상 그것을 개선해보기 위해 내가 쏟은 노력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.
충고해주신 것 처럼, 처음부터 바로 고치기 힘들다면 편한대로 쓰고 난 뒤 단문으로 자르면서 풀어나가는 연습과
괄호를 다른 다양한 표현을 이용해 밖으로 끄집어낸다거나 일명 '방어적인' 괄호는 줄이려는 노력을 해나가야겠다...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글을 쓰면서 그러한 노력을 했었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부끄러워진다. =.=
-끝- (읽느라 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다.)
내가 보통 '일기'라고 하는 글을 적는 이 노트가 실제로 검정색이기 때문이었다.
물론 이런 애칭이 붙여진 이후로 "검정노트"란 말은
색깔 이상의,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하게 되었다.
이 노트에 적는 글은 날짜만 꼬박꼬박 붙었다 뿐이지,
일기라고는 할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을 난 진작에 알고 있었다.
하지만 그 장르가 무엇인지, 아니 장르라고까지 할 것도 없고 어떤 성격의 글인지
굳이 설명하려거나 규정해 보려 애써본 적이 없었다.
아니, 그럴 필요가 없었다.
"검정노트"는 그저 내가 좋아서 붙인 이름이었고 나 혼자서만 쓰는 이름이었다.
아직까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이 노트에 대해
이것이 가진 무수한 의미는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.
그 모든 것을 '언어화' 하여 낱낱이 늘여놓아야 할 이유도 상황도 기회도 동기부여도 없었다.
나의 검정노트는 그 자체로서 "검정노트"이면 되는 것이었다. 적어도 지금까지는.
(참고: 2011/03/19 - [의식주/혼잣말] - 용기가 가득하면 좋겠어)
그런데 오늘 근영선생님의 융(C.G. Jung) 강의를 듣던 중에
전에 못 본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. (왜 그 동안은 몰랐을까?!)
누군가의 병을 고치기 이전에 '자기 자신의 의사'가 되려던 융이
'치유로서의 글쓰기'를 해나가던 방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,
그 첫번째가, 기억이나 꿈, 어떤 사건과 그 때의 감정에 대해
논리적 구성이나 인과적 서사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.
융은 그 과정을 '받아쓰기'라 표현하였고
자신이 '받아쓰기' 한 총 6권의 노트 ㅡ 어느 시점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ㅡ를
"검정책"이라 불렀다는 사실. !!!
이 "검정책"이라는 세 글자는 나의 얄팍한 공감대를 완벽히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.
(게다가 지난 두 해 동안 내가 융을 향해 쌓아온 애정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!)
그러고서, 그렇게 '받아쓰기'하여 언어라는 틀에 고정된 글을
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풀어내고 지적, 도덕적 여과 과정을 거쳐
하나 하나의 서사 ㅡ 신화로 엮어내는 두번째 과정을
융은 '번역하기'라 일컬었고
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'붉은책 The Red Book'이라는 것.
(참고할 만한 기사: http://www.seoul.co.kr/news/newsView.php?id=20110425021002)
그렇다. 내가 사랑하는 동서고금의 저자들이 흔히 그렇듯
융은 나를 대신하여, 내가 "검정노트"에 쓰는 글, 나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그 글(의 일부분)에 '받아쓰기'라는 자신만의 멋드러진 해석을 붙여준 것이다.
하긴,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어쩌면, "검정노트"에 씌여진 글 중 적어도 팔할 이상은
융이 그토록 비판하던 '자기 합리화'의 글일런지도 모른다.
묘사 이전에 이미 서사적 인과관계를 짜맞추는,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글.
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중에는 '받아쓰기'한 글이 꽤 있다는 것이고,
나는 그간 그 모든 '받아쓰기' 글을 '손을 보긴 봐야'할 것만 같은데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,
어려운 숙제를 남겨두고 잠드는 학생의 기분으로 차일피일 찜찜하게 미루고만 있던 것이다.
그런데, 이제 아예 융이 그 고민에 대한 해답까지 알려주고 있다. '번역하기'.
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번역을 해나갈지는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다.
하지만,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무얼 해야할지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
나는 올 가을 융에게 또 하나의 빚을 지게 된 셈이 되었다.
"붉은노트" 까지 쓰려는 욕심은 없다.
그건 아직 저ㅡ높이 아주 높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 일 뿐.
지금은 단지, 번역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일말의 감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으로
어디 한 번 찬찬히 시작을 해보려 한다.
아참 그리고, 좀 더 기술적(?)인 부분으로 눈을 돌리자면,
최근에 몇몇 분들께 나의 만연체와 괄호쓰기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.
특히 호흡이 너무 긴 만연체에 대해선 처음 듣는 지적이 아닌데다
(심지어 고등학생 시절 영어글쓰기를 연마하던 때에도 들었다 -.-)
평소에 블로그 등에 글을 쓰면서도 나 스스로 영 불편하고 찜찜하게 느껴지던 부분이었는데,
막상 그것을 개선해보기 위해 내가 쏟은 노력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.
충고해주신 것 처럼, 처음부터 바로 고치기 힘들다면 편한대로 쓰고 난 뒤 단문으로 자르면서 풀어나가는 연습과
괄호를 다른 다양한 표현을 이용해 밖으로 끄집어낸다거나 일명 '방어적인' 괄호는 줄이려는 노력을 해나가야겠다...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글을 쓰면서 그러한 노력을 했었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부끄러워진다. =.=
-끝- (읽느라 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다.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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